이해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민주주의 50年 산증인"민주 진영 선봉장 자처한 투사

이장성 기자 / 기사승인 : 2026-01-25 17:3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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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으로 옥고 뒤 현실정치 투신…'무패의 7선'·'실세 총리' 명성
DJ부터 이재명까지 4번의 민주당 정권 출범에 역할…'20년 집권론' 화제

베트남 출장 중이던 이해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이 23일 현지에서 건강이 급격히 악화해 위독한 상태다. 병원 이송 과정에서 심정지도 있었지만 지금은 호흡이 돌아온 것으로 전해졌다. 현지 심장 전문 의료진은 심근경색 진단을 내리고 이 부의장에게 스텐트를 삽입하는 시술을 시행했다. 이에 이재명 대통령은 조정식 정무특보를 현지에 급파하기로 했다. 사진은 지난해 11월 제22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는 이해찬 전 총리.

[세계타임즈 = 이장성 기자] 25일 별세한 이해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은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선두에 섰던 투사이자 7선 국회의원과 국무총리를 지낸 대한민국 민주 진영의 산증인이었다.1973년 박정희 대통령 유신 체제에 맞선 민주화 운동을 시작으로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에서 정부와 당 주요 보직을 맡으며 민주 진영을 지켰던 반세기의 역정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와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울대 사회학과 재학 중 학생운동에 투신한 뒤 1974년 유신체제에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1년 가까이 옥고를 치렀고,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10년형을 선고받았다.고인이 내란음모 사건 재판에서 "이 목숨 다 바쳐 이 땅이 민주화될 때까지 싸워나가겠다. 당신들이 저지르고 있는 역사적 범죄를 결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일갈한 일화로 유명하다.모진 고문과 수감 생활도 고인의 민주화 의지는 꺾지 못했다. 육군교도소 수감 중 김대중 전 대통령과 문익환 목사 등 재야 지도자들과 만나며 민주화 열망을 더욱 키웠고, 1982년 성탄절 특사로 석방된 뒤 재야 운동을 이어갔다.

1987년 6월 항쟁을 주도했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황실장을 맡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끌어낸 고인은 이후 정치 여정 2막을 시작했다.고인은 1987년까지는 민주화의 꿈을 향해 달렸고, 이후에는 민주적 국민정당 건설이 목표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1987년 13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낙선한 후 평화민주당에 입당했고, 이듬해 13대 총선에서 서울 관악을 지역구에 출마해 민주정의당 김종인 후보를 꺾고 국회에 입성했다. 이후 관악을 지역에서만 17대 총선까지 내리 5선을 했다.1988년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청문회에서 계엄군의 광주시민에 대한 살상 행위를 낱낱이 밝혀내면서 '면도날'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노동 분야 입법 활동에도 주력하며 노무현 전 대통령, 이상수 전 의원과 함께 '노동위 3총사'로도 불렸다.1995년 민선 1기 서울시에서 정무부시장을 맡았고, 1998년 김대중 정부 초대 교육부 장관을 지냈다.교육부 장관으로서 고교 평준화 확대 등으로 학교 교육 정상화에 힘썼다는 평가를 받지만, 일선 고교 야간 자율학습 폐지에 따른 학력 저하 논란도 제기됐다. 당시 고교생들을 지칭하는 '이해찬 세대'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2002년 16대 대선 때는 새천년민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기획본부장을 맡아 초선 시절 함께 활약했던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을 도왔다.2003년 국민참여통합신당 창당 기획단장을 맡아 열린우리당 창당을 이끌었고, 2004년 고건 전 총리에 이어 노무현 정부의 두 번째 총리로 임명됐다.고인은 노 대통령과 유일하게 '맞담배'를 피울 정도로 가까운 핵심 측근으로 불렸던 만큼 '실세 총리'로 받아들여졌다.실제로 노 대통령은 고인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냈다. 노 대통령은 "나와 천생연분이다", "정말 유능하다"는 평가를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총리 시절 행정 수도 이전을 주도하고, 이라크 파병 등을 두고 불협화음을 빚던 당정청 관계를 복원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하지만 2006년 3월 '3·1절 골프' 파문이 일며 거센 사퇴 압박을 받았고, 끝내 총리직에서 불명예스럽게 물러났다.총리 시절 대정부질문 때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 의원들과 거침없는 설전을 벌여 '버럭 해찬'이라는 별명을 얻었다.이런 직설적인 화법과 성격은 이른바 협치 정신에 맞지 않는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일부 있다.

2007년 17대 대선 당시 대통합민주신당 후보 경선에 출마했다가 낙선했고, 대선 패배 후 18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이후 민주통합당 대표에 올랐으나 18대 대선을 앞두고 문재인·안철수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사퇴 압박을 받은 끝에 대표직에서 물러났다.2012년 19대 총선에선 세종시에 출마해 당선됐고, 2014∼2018년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맡으며 친노(친노무현) 진영의 좌장 역할을 했다.2016년 20대 총선에서는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 체제에서 컷오프(공천 배제)됐고, 탈당 후 무소속으로 세종에 출마해 당선됐다.당선 후 더불어민주당에 복당한 고인은 문재인 정부 때인 2018년 당 대표로 선출됐다.

고인은 노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던 문재인 대통령과 과거 총리 때 호흡을 맞췄던 깊은 신뢰 관계를 토대로 긴밀한 당청 관계를 구축했으며 이런 이유로 당내에서는 실세 당 대표로 통했다.고인은 코로나19 대유행과 겹친 21대 총선 때 시스템 공천 등을 통해 총선을 압승으로 이끌기도 했다.당시 민주당은 위성 비례정당을 포함해 300석 중 180석을 확보, 1987년 이후 가장 의석수가 많은 정당으로 거듭났다.

2018년 전당대회 선거운동 때 "개혁정책이 뿌리내리려면 20년 정도는 집권하는 계획을 가져야 한다"며 이른바 민주진영 20년 집권론을 언급했던 고인은 21대 총선을 앞두고는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고 그것을 기반으로 2022년 대선에서 재집권함으로써 앞으로 한반도의 평화를 가져오는 100년을 전개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고인은 자신이 '마지막 소임'이라고 밝힌 당 대표 임기가 끝난 뒤 2020년 당 상임고문으로 활동했다.2024년 22대 총선에서는 당시 당 대표였던 이재명 대통령, 김부겸 전 총리와 함께 상임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맡으며 총선 승리를 이끌었다.지난해 10월에는 제22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으로 임명돼 이재명 정부의 대북·통일 정책 입안을 뒷받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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